본문 바로가기

Archive/.lines

2011.05 종말의 바보

728x90


p. 18

야스코는 나의 자랑이었고, 그것은 곧 "그런데 가즈야는 뭐냐."라고

종종 투덜거리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아이들이 가지고 온 성적표, 가즈야의 것과 야스코의 것을 비교할 때마다

'실패작과 걸작' 이라는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가즈야의 유약함과 무능함이 나에게서 물려받은 것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어쩌다 생긴 실패작' 이라고 믿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p. 19

딸과 사이가 나쁘다는 것은 분명 괴로운 일이고, 나누고 싶은 말은 산더미 같았지만

"녀석이 사과하지 않는 한 내 알 바 아냐." 하고 대답했다. 본심이었다.

 

p. 31

"잔혹한 호러 영화로, 사람이 잇달아 살해되는 건 어떠십니까?"

"사람이 잔혹하게 죽는 영화를 보는 게 뭐가 재밋나?"

"적어도." 와타베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것에 비하면 운석 쪽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죠."

 

p. 35

목덜미가 드러나는 붉게 물든 가을 단풍색 셔츠를 입고 폭이 좁은 감색 바지를 입었다.

분명, 올해로 서른 둘이 되었을 텐데, 몸이 이십대처럼 날씬해 보였다.

머리칼은 짧았다. 어깨에도 미치지 않을 만큼 짧아서 활동적인 인상을 주었다.

 

p. 41

아니, 틀림없이 흉한 벌레라도 본 것처럼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냈을 테지만,

지금은 가슴 속으로 부드러운 공기가 흘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가붓하고 근실근실한 뭔가가 배 아래에서 목으로 밀려 올라오더니,

이윽고 기분 좋은 한숨이 되어 입으로 튀어나왔다.

그것이 웃음이라는 걸 처음엔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다.

 

p. 43

"나, 아버지 때문에 내내 힘들었어요. 항상 성적이니 등수니, 결과에만 신경를 쓰고."

마치 죄목을 읽어 내려가는 것 같은 말투였다.

 

"항상 사람을 바보 취급하고, 곁에 있는 나까지 마음이 거칠어졌어요.

어렸을 때부터 압박감만 느꼈고, 오빠가 죽은 것도 아버지 탓이라고, 난 그렇게 생각했어요."

 

p. 45

"아시겠어요? 3년 뒤, 세상이 끝날 때 아버지 곁에 있어줄 사람은 어머니일 거예요.

어머니밖에 없어요. 그러니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비위를 맞춰주는 게 좋지 않겠어요?"

 

p. 50

"하지만 진짜 우유부단한 사람이라면 그 대회에 나갈까 말까부터 고민할 테니

그런 콘테스트 자체가 개최되지 않을 걸요."

 

p. 51

어차피 죽을 거라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는, 이상한 핑계였지만 어쨌거나 별일이 다 있었다.

 

p. 67

이것이 최근 우리의 일과였다. 우리 집의 유행이라고 해도 좋다. 식후에는 오셀로가 최고다.

 

p. 72

"우리가 여기서 아이를 포기하면, 소행성 충돌을 받아들이는게 되지 않을까?

어디서 누군가가 우릴 보고 있다가, 그러면 충돌시키자, 이렇게 판단할지도 몰라."

"어디서 누구라니, 누구?"

"몰라. 아주 멀리서 이쪽을 지켜보는 무언가 말이야."

"하느님처럼?"

"3번지에 사는 야마다 씨 같은 사람은 틀림없이 아닐 테지.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거꾸로 우리가 애를 낳기로 하면 말이야."

"소행성이 부딪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그렇다는 거지."

 

p. 80

저물어가는 태양은 하늘에 붙여놓은 깨끗한 원형 스티커처럼 선명했다.

"소행성이 떨어져서 우리가 없어지더라도 틀림없이 저 태양이나 구름은 남을 테지?"

"그러고 보니 그렇군" 저 스티커는 쉽사리 떼어낼 수 없을 것 같다.

"마음이 조금 든든한걸." 쓰치야가 툭 던진 말이 인상적이었다.

 

p. 87

창 너머로 꽤나 작아 보이는 태양이 내 오른쪽 뺨을 비추고 있었다.

세상의 끝이 온다 해도 필시 꿈쩍도 하지 않을, 올곧고 강인한 눈부심이었다.

 

p. 92

형은 최근 10년간 몸에 익힌, 감정의 기복을 완전히 지운 차가운 표정으로 턱을 끌어당겼다.

은테 안경 뒤의 두 눈은 여전히 생기가 없다. 나보다 두 살 위인 서른둘이지만, 실제 나이보다 훨씬 많아 보였다.

노숙하다거나 성숙하다기보다는 죽음을 앞두고 성장을 포기한, 말린 꽃 같은 인상이다.

 

p. 97

흰 피부에 가냘픈 몸, 열아홉 살치고는 꽤 어른스러웠던 아키코는

오빠라서 예쁘게 보이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분명 미인이었다.

눈 꼬리가 약간 올라간 커다란 눈에서는 지적이고 강한 인상이 엿보였고,

뾰족한 턱은 품위있는 분위기를 풍겻다. 그런 언밸런스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p. 115

"알겠어? 우린 네가 반성하길 바라는 게 아니야." 형이 뒤를 이어 말했다.

"궁지에 몰려서 반성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너는 지금보다 훨씬 전에,

우리가 오기 전에, 소행성이 발견되기 전에 반성했어야 해. 이젠 늦었어.

이건 마지막 기회가 아니야. 그냥 마지막일 뿐이다."

 

p. 118

이것도 종말을 사는 방법의 하나인 것일까. 세상 말세다.

 

p. 136

서재를 나왔다. 내내 이 방에서 책을 읽으며 동면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엇다.

막 깼어요. 봄입니까? 천천히 문을 닫았다.

 

p. 137

내 방으로 갔다. 아빠가 엄마와 함께 죽은 4년 전부터는 이 아파트 단지의 301호실이 전부 '내 방'인 셈이지만,

그래도 역시 내 방은 동쪽에 있는 카펫 깔린 세 평짜리 방이다.

 

p. 144

아, 역시 아름다워졌구나, 넋을 잃고 목소리를 높일 뻔했다.

중학교 때부터 세이코는 다른 어떤 친구보다 예뻤다.

뾰족한 턱에 얼굴은 작고, 약간 치켜 올라간 눈은 도발적이었다.

머리를 길렀던 예전과 달리 단발인데, 그것 또한 잘 어울린다.

 

p. 146

머리를 뒤로 묶은, 얼굴이 동그란 여자였다. 또렷한 쌍꺼풀눈이 예뻤다.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느낌이 별로네." 점원이 말했다.

그 말투가 너무나 가볍고 산뜻해서 불쾌감 같은 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원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 152

얼굴도 몸도 가녀린, 작은 체구엿다.

백발섞인 머리칼은 메말라서, 실례되는 말이긴 하지만 온몸이 시든 꽃 같았다.

 

p. 153

'새로운 것을 시작하려면 세 사람의 의견을 들어라.' 라고요

"네. 우선은 존경하는 사람. 다음엔 자신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세 번재는 앞으로 새롭게 만날 사람."

 

p. 158

그랬구나. 나는 이상한 기분으로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류타가 죽었다는 것도 실감이 나지 않았고, 차 밑에 깔려 죽었다는 것도 얼핏 이해가 안 되었다.

내가 읽은 책에는 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그려져 있지만, 그런 사인은 없었다.

 

p. 169

"연애란 쉽게 시작되는 경우도 많아. 그러다가 만약 아무도 없으면, 그땐 나한테 와."

"에" 하고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고마쓰자키 씨가 애인이 되겠단 말예요?"

"최악의 경우엔." "싫어요. 그럴 거면 혼자 동면할래요."

"다쿠치 미치, 다섯 과목 472점. 네가 맞다."

 

p. 171

거리가 너무나 잘 내려다보였다. 멀리는 센다이의 즐비한 거리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고,

공원 주변 집들의 대지도 드문드문 환히 드러나 보였다.

목을 빼고 좌우를 둘러보니, 힐즈타운의 모습도 잘 보였다.

 

p. 191

불합리하다고 아우성치고, 공포에 부들부들 떨고,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돌변하던 일은 벌써 끝났다.

십대 젊은이는 어쨌거나 잘 질리게 마련이라 절망하는 데도 벌써 질린 것이다.

 

p. 210

"내일 죽는다고 삶의 방식이 바뀝니까?"

"지금 당신 삶의 방식은 얼마나 살 생각으로 선택한 방식입니까?"

 

p. 224

"여전히 상대방을 발끈하게 만드는 말투군."

"이렇게 말하는 방법밖에 몰라."

사과하는 그의 목소리엔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주십시오."

하는 현금자동인출기 음성 정도의 마음밖에 담겨 있지 않았다.

 

p. 230

"전혀, 달라. 쓸모 있는 것과 쓸모 있을 법한 것과는 별개야.

훌륭한 사람과 훌륭할 것 같은 사람이 전혀 다른 것과 마찬가지라고."

 

p. 246

"그럼 말이야. 만약 이대로 인간이 멸종해서 말이지."

"그렇게 되겠지."

"수만 년이 지나 다른 생물이 발달했다고 치자."

"아, 그거, 괄태충."

"그런 만화가 있었지." 니노미야가 강하게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야, 그 괄태충들이 우리 화석을 보면 지능 낮은 소형 포유류가 알몸으로 걸어 다녔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인간의 문화 따위는 몇만 년 지나면 전부 사라질 테니가."

"만일 그렇다 해도, 그게 뭐 어쨌다고?"

"그래서 그 괄태충들이 자기들을 '인간'이라 부르기 시작할지도 모르는 거지. 우리는 공룡이라 이름 붙이고."

"우리는 용이 아니잖아."

"예전의 공룡도 같은 얘기를 했을지 몰라. 다시 말해서, 우린 별로 특별한 존재가 아니란 거지.

소행성 충돌도 특별한 게 아니란 말이야. 매번 일어나는 거야. 반복해서."

 

p. 260

"이런 딸을 용서해주세요."

이렇게 인사하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유쾌하게 얼굴을 마주보며

"대신 너도 언젠가 다른 누군가를 용서해주려무나." 하셨다.

 

p. 284

주위를 조급하게 살피면서 "개야! 개야!" 하고 불렀다.

 

p. 287

"뭐가 아이들을 위한 게 될까, 하고 열심히 궁리해서 정했으면 그걸로 옳다고 생각해, 나는.

남들은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있겠지만, 고민해서 정한 사람이 제일 훌륭한 거니까."

 

p. 299

그 배우는 인터뷰어에게 아주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뭐라고? 거짓말이지? 소행성? 그게 정말이야?"

모르셨습니까? 인터뷰어가 놀라 몸을 뒤로 젖혔다. 화면 건너편의 나도 뒤로 자빠졌다.

 

p. 317

"인생을 산에 비유하는 건 진부해요."

아버지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알았냐? 이유 따윈 모르지만, 어쨌거나 자살 같은 걸 하면 죽여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

 

p. 333

"이상한 느낌이었나요?"

기쁜 것도 아니고, 놀란 것도 아니고, 그저 이상했다고 그가 되풀이하며 말했다.

 

p. 349

사실 하늘색이란 것은, 애매한 색깔이지요.

파란색처럼 서늘하면서 안정된 이미지도 아니고, 빨간색처럼 강렬한 느낌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노란색처럼

어딘가 마니아적인 분위기를 주는 것도 아닙니다. 혹은 핑크나 보라색처럼 다각적인 이미지를 품고 있지도 않습니다.

 

 

 


 

300x250

'Archive > .lin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03 황혼녘 백합의 뼈  (0) 2014.10.22
2013.09 마리아비틀  (0) 2014.10.22
2012.04 오듀본의 기도(다시)  (0) 2014.10.22
2012.04 골든 슬럼버  (0) 2014.10.22
2011.05 사막  (0) 2014.10.22
2011.05 오듀본의 기도  (0) 2014.10.22
2011.05 러시 라이프  (0) 2014.10.22
2011.05 피쉬 스토리  (0) 2014.10.22
2011.04 명랑한 갱의 일상과 습격  (0) 2014.10.22
2011.04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  (0) 2014.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