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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 오듀본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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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8

싸늘해 보이긴 하지만 티끌 하나 없이 맑게 개어 있다. 평온한 겨울 하늘.

 

p. 12

긴 경사길은 걷고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상쾌해졌다.

시끌시끌한 소음은 어디에도 없고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이따금씩 귓바퀴를 스쳐지나간다.

 

p. 17

할머니는 뿌리 깊은 맛이 나는 종교를 사랑하셨다. 특정 신앙을 갖지는 않았지만,

인간을 싫어하는 할머니는 인간 이외의 존재를 떠받드는 방식을 매우 좋아했다.

 

"산에 무슨 이름을 붙이냐."고 우습다는 듯 흘려 넘긴다.

 

p. 20

"사실과 반대되는 말만 한다고. 예스일 경우엔 노라고 대답한다 이 말이야."

 

p. 26

허수아비의 키는 나와 비슷햇다. 품을 들여 아주 꼼꼼히 만들어졌다는 것 정도는, 얼른 봐서도 알겠다.

그의 몸을 지탱하는 것은 굵고 단단한 나무다. 위로 곧게 뻗은 것이 상처 하나 없다.

나무토막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표면은 가공처리를 했다. 근처 아무데나 떨어져 있는 나무로 만든,

흔해빠진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다리와 같은 재질인 팔은 몸통과 수평을 이뤄 단단히 묶여 있었다.

그는 새하얗고 깨끗한 긴팔 셔츠를 입고 있다. 위화감이 든다.

허수아비란 원래 비오는 날엔 올곧이 비를 맞고, 한여름엔 땡볕에 쪼이다가 바람에 휘둘리기도 하고

너덜너덜한 채 우두커니 서 있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것이 내가 알고 있던 허수아비 본연의 모습이었다.

 

p. 38

"정확히 말하자면 단정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게 맞습니다. 당신의 미래에 대해 나는 몇 가지 경로를 알고 있습니다.

미래의 시나리오는 크게 나누어 몇 십 편이나 됩니다. 그것을 더 자세히 나누면 몇 억 개도 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당신이 실제로 다다르게 될 미래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대체 어느 미래가 될 것인지는

약간의 조건만으로도 변하게 됩니다." 허수아비는 잔잔한 음성으로 천천히 말했다.

 

p. 46

"인생이란 건 말이지, 백화점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나 매한가지야. 너는 제자리에 멈춰 서 있어도

어느 틈엔가 저 앞으로 나가 있지. 그 위에 첫발을 디딘 순간부터 흘러가는 거야.

도착하는 곳은 이미 정해져 있지. 제 멋대로 그곳으로 향해 간다 이거야.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몰라. 자기가 있는 장소만큼은 에스컬레이터가 아니라고들 생각해."

 

그러고 난 다음에, 어차피 에스컬레이터는 네가 좋든 싫든 앞으로 흘러가니까

숨이 턱에 받치도록 일하기보다 맛있는 거나 먹고 쉬엄쉬엄 사는 게 득 보는 거라고 했다.

 

p. 54

어린아이는 누구나 어린 시절 부모의 애정을 필요로 하고 그것은 입으로 먹는 우유와 마찬가지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했다. 시즈카는, 평상시 엄마가 없는 상황에 익숙했다.

익숙하기는 했지만 안으로는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애정결핍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자기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축적된 것이다.

시즈카의 경우는 10대 중반에 접어들 무렵, 쌓이고 쌓인 불만이 폭발했다.

 

p. 63

"과대평가예요."

"허수아비가 사람을 과대평가한다고?"

과대평가고 과소평가고 간에 애당초, 허수아비는 사람 말을 하지 않는다고요.

 

p. 64

수염으로 어린 티를 감추려고 한 것 같은데, 오히려 그 손질 안 한 수염이 젊음을 도드라지게 했다.

 

p. 67

'누군가 나를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어.' 시즈카가 말할 때마다 나는

내가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p. 88

"저, 저는 아직 어려서 이런 건 잘 몰랐어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연기력을 발휘하여 소년은 읍소했다.

"이런 게 나쁜 짓인 줄은 몰랐어요."

선악에 대한 판단이 서지 않은 어린아이처럼 연기했다.

 

"이유가 안 돼."

 

p. 89

"3년 전에는 아주 예상치 못한 일도 있엇어.

착한 사람으로 소문이 자자한 세무사 양반이 사쿠라의 총에 맞은 거야."

"착한 사람인데요?"

"그렇게 보였던 것뿐이었어."

 

아아, 그렇군요. 나는 거기서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지만,

사실은 이 섬에도 세금제도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 그런 것이었다.

 

p. 100

아이러니컬하게도 조금 전 여자들이 히비노에게 보인 태도는 지금 그의 태도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여자들은 히비노를 우습게 보고 당사자인 히비노는 다리가 불편한 다나카를 우습게 보고 있다.

세상은 어딜 가나 이런 식으로 서열을 매기게 되어 있는 것일까.

 

p. 101

"본인이 원해서 가난하게 태어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본이 원해서 못생긴 얼굴로 태어나는 사람도 없지.

핸디캡은 그렇게 불공평하게 주어지는 거야."

 

"생각해 봐, 그렇잖아. 저 다나카의 바람이 뭔지 알아? 만일 신이 나타나 한 가지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했다 치자.

저 사람이 무엇을 빌 것 같아? 난 알아. 저 다나카라는 남자는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걷게 해 주세요.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똑바로 걸어 보고 싶어요.' 라고 할 거야. 틀림없다고."

"뭐 그렇긴 한데요."

 

" 그 소원, 나는 이미 이루었지."

"네?"

 

"나는 평범하게 걷고 있잖아. 저 남자가 기적이라도 일어나길 바라는 소원이 나에게는 이미 이루어졌다고.

그러니 나는 훨씬 낫다 이거지. 안 그래?"

 

p. 104

서로 웃는 경우는 있었지만 우리 둘 사이엔 날카로운 가시 같은 것이 늘 가로막고 있었다.

시즈카는 나를 애인으로 인정은 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절대로 져서는 안되는 적. 내가 강해서 그런 게 아니다. 약하기 때문이다.

 

p. 121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렇게 머리가 좋고 상대의 아픔을 헤아리려 하지 않는 자는, 오래 삽니다."

"그렇겠죠."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카만 밤하늘이 이제나 저제나 나를 휘감으려고 벼르는 것처럼 보였다.

 

p. 128

히비노의 고독이 느껴지는것 같다. '동정'이라는 말이 가장 적절할지 모르겠다,

쪽빛 밤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그것이 내게 스미는 듯 했다.

 

p. 141

그런 책에 나오는 탐정들은 사건의 발생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건을 풀어가기 위해 존재했다.

모든 정황을 밝혀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구해내진 않는다.

내가 펼쳐 놓은 소설을, 언젠가 시즈카가 읽더니 이런 말을 했다.

 

'이 명탐정이라는 인물은 뭘 위해 있는지 알아? 우리를 위해서야.

바로 이야기 밖에 있는 우리를 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시시해.'

 

p. 188

나는 나그네 비둘기를 죽인 남자들, 때론 여자도 섞여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을 경멸하며 냉소하지 않았다.

그들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다.

 

아마도 그런 그들도 따로 만나보면 사람 좋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일 수도 있다.

 

p. 189

세상에는 '흐름'이 있는데 거기엔 아무도 대항할 수 없다.

흐름은, 눈보라나 홍수처럼 거대하지만 물이 데워지는 것처럼 천천히 찾아온다.

 

p. 190

"상실한 것은 두 번 다시 되돌아지 않아."

"만약 되돌아오면 어쩔 거유?"

 

"상실한 것이 되돌아오면 어쩔 건데? 어째야 하는데?"

"다음 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잃지 않도록 하는 수밖에 없지."

 

p. 198

구사나기에게 유리 씨는 중심을 잡고 살아가기 위한 버팀목 같은 존재일런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균형을 잡기 위해 꼭 필요한 버팀목. 그는 소중한 버팀목이 상처입는 것은 물론, 누가 손 대는 것조차 싫은 것이다.

 

p. 210

"당시만 해도 작고 귀여웠어요. 내가 토끼잖아요. 사람들이 전부 귀엽다, 귀엽다 하면서 과자를 주었죠.

나도 달콤한 걸 좋아했으니까 싫다 할 리 없었죠. 그래서 하나, 둘 받아벅다보니 비만이 이렇게 심해진 거죠."

 

p. 231

"히비노는 자기 자신이 결핍을 느끼기 때문에 외부에서 뭔가 채워지길 원하는 거다."

그 말은 상당히 예리한 분석으로 들렸다.

 

'부모의 애정'이라는 중요한 요소가 결여되어 있는 히비노는 '이 섬에는 중요한 것이 없다.'는 소리를 반복하며

누군가 그것을 채워 줄 것이라 믿음으로써 제 자신의 빈자리를 메꾸려는 게 아닐까.

 

p. 268

밤이 진짜, 라고 그는 말했다.

 

밤을 즐기는 것이 진짜 야경을 즐기는 것이다.

별과 밤과 그리고 새까만 바다, 바로 그러한 것들이 밤의 풍경이 아니냐고 그는 조용히 말했다.

 

p. 270

조용하고 새카만 밤에, 짙푸른 하늘과 그 위에 흩어져 반짝이는 속삭임 같은 별빛,

끝없이 깊은 바다와 그 소리를, 땅바닥에 주저앉아 즐기는 것도 멋진 오락일 것 같았다.

상당한 호사라는 생각이 든다.

밤을 응시한다. 내가 사는 센다이에서는 불가능한 즐거움이다.

 

p. 301

'나쁜 짓을 하면 반드시 천벌을 받는다.'는 옛말을, 나는 좋아한다.

왜냐하면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p. 313

유고가 말하면, 그게 바로 정답이 된다.

비록 진실과는 어긋나더라도 유고가 이름을 대면 그 인간이 범인이다.

명탐정이 발언을 하면 그것이 곧 진상이 되는 것과 같다.

 

p. 333

"일종의 뇌물이지 뭐."

와카바는 어린애 같은 말투로 전혀 어린애답지 않은 말을 했다.

 

p. 345

말을 걸어 보았다. 이 섬에 와서 내가 변한 점이라면

낯선 상대에게 선선히 말을 걸게 됐다는 것이었다.

 

p. 405

"저 녀석의 엄마는 강에서 익사했어. 저 녀석은 그때 강변에서 개와 이야기하고 있었지. 개랑 말이야.

그게 또 웃기는 부분인데, 아무튼 저 녀석이 개와 바보짓을 하고 있는 동안에 엄마가 죽어버린 거야.

자기가 떠들지 않고 조용히 있었으면 엄마의 비명소리를 들었을 거라 생각하고 있어, 쟤는.

그 뒤로는 숨 한 번 크게 못 쉬지. 바보 녀석. 저 녀석은 아주 어린아이였다고.

자기가 비명소리를 들은들 물에 빠진 어머니를 구할 수 있었겠어?"

 

p. 468

나중에 간호사가 조금 망설이면서 가르쳐 주었다. 할머님은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아무렴, 사랑하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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