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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 골든 슬럼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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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해. 사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어느 날, 낯선 여자가 취미를 물어왔다.

8년만에 녀석이 만나자는 전화를 걸어왔다.

보낸 이를 알 수 없는 우편물이 반복해서 도착했다.

난데없이 치한으로 몰려 지하철을 내려야 했다.

문득, 그녀와 헤어진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지나치게 예상 밖으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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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한 복선, 퍼즐식 구성, 투명한 감성, 철학적인 대화까지 이사카 코타로 작품세계의 정수만을 뽑아낸 엔터테인먼트 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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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가네다 총리 살해사건에 대한 갖가지 설이 난무한다.

정부였다는 소문이 있는 고바야시 히카루코가 자신의 처지가 전혀 나아지지 않자 정이 떨어져서 노동당에 살해를 의뢰했다는 설, 혹은 가네다 총리가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아 그에 반발한 그룹이 범행을 저질렀다는 설도 때로 강하게 제기된다. 하지만 고바야시 히마루코가 가네다 사망 후 자살했다는 것, 그리고 가네다 총리가 해고한 비서 중 하나가 동성애자였다는 것은 사실 이상의 근거는 없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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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실한 인간들한테서 많이 볼 수 있는 경우군. 아등바등 일하다 보면 어느 날 문득 만사 때려치우고 싶어지는 법이지."

단정적인 어투로, 게다가 어딘가 무책임한 말을 하는 대학 친구를 마주 보며 아오야기는 참 반갑다 싶어 즐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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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집을 비웁니다. 소포는 관리인에게. 커다래져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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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고 철ㅆ같이 믿고 있을 때 실수를 하는 법이야."

-

"이렇게 말이야, 대강대강 하면 될 텐데.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쓸 게 뭐 있어. 초콜릿이 좀 작아도 화 안 내. 우리, 벌써 꽤 오래 사귀었지? 졸업 후로는 일 때문에 뜸해졌지만 거의 매일 붙어 있었고, 그렇게까지 신경을 쓸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친할수록 예의를 지켜야 한단 말이 있잖아."

"판 초콜릿 반으로 쪼갠 게 그렇게 잘못이야?"

"아오야기는 늘 조금이라도 큰 쪽을 나한테 줘."

...
"얼마 전까지, 나, 게임 했잖아."

아닌게 아니라 최근까지 그녀는 서랍에서 게임기를 꺼내 들고 옛날 생각이 난다며 자주 가지고 놀았다.

"기분 나쁜 물고기를 키우는 거지." 아오야기는 끄덕인다. 귀염성이라고는 요만치도 없는, 인간의 말을 하는 물고기를 키울 뿐인 얄궂은 게임이었다.

"어쨌든 그 물고기가, 먹이를 먹은 뒤 이렇게 말했어."

"뭐라고?"

"너, 꿈을 크게 가져."

...

처음에는 영 내키지 않아 거지반 기계적으로 조작했지만, 나중에는 "사실 오늘 말이야" 하며 근무 중에 겪은 일을 물고기에게 조잘대는 자신을 보고 기가 막혔다. 2주일쯤 그러고 있자니 어느 날 밤 화면 속에서 물고기가 휙 돌아보며 말했다.

"너, 꿈을 크게 가져."

"그 말, 전에 히구치한테도 했지?" "너 때문이야."

물론 화면 속 물고기는 유유히 헤엄만 칠 뿐이었다.

"그렇지만 말이야. 그때, 작은 초콜릿을 줬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분명히 성질 부렸을 거야. 넌 어떻게 생각해?"

물고기는 나 몰라라, 헤엄만 쳤다. 이윽고 동작을 딱 멈추더니 화면 정면에 앉은 아오야기를 보며 잘난 주둥이를 벌렸다.

"잉? 방금 뭐라고 했냐, 너?"

-

"아빠 뭐래?"

"나나미가 싫어하는 오이를 먹게 되면 돌아오신대."

"그럼 안 와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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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람이란 가까이에서 함께 지내는 연장자의 영향을 받아요. 초등학생이라면 6학년이 가장 연장자죠. 그렇다 보니 6학년은 자신의 감각 그대로 행동하죠. 하지만 중학교에 입학하면 중학교 3학년이 최고 연장자예요. 그렇게 되면 중3들의 감각이 이 친구들을 자극하죠. 싫든 좋든. 한창 사춘기를 겪는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이 이 친구들의 본보기가 되는 거죠. 그래서 한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도 감각적으로는 세 살 차이가 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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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죽이는 일은 있어도, 치한 짓은 안 할걸."

"들어봐. 사람을 죽이는 게 옳다는 말이 아니야. 하지만 내 몸을 지켜야 할 때라든가, 이를테면 가족을 지켜야 할 때, 그런 때는 자칫 상대를 죽일 가능성도 없다고는 못 하지. 진심을 말하자면 난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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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타, 너 죽었다던데 진짜야?" 하고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모리타라면 "뭐, 그런 셈이지. 숲의 목소리가 손짓을 한 거지" 하고 초연히 대꾸할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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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놀이는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이 보는 거잖아. 내가 보고 있는 지금, 어쩌면 다른 곳에서 옛 친구가 같은 것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유쾌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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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야기는 방바닥이 푹 꺼지면서 낙하하는 느낌을 받았다. 차가운 손가락이 등짝을 싸악 훑는다. 목덜미가 서늘해진다. 바로 하루 전, 육교에서 마에조노의 트럭 위로 뛰어내렸을 때, 그 낙하의 감각이다.

-

그 말에 곧바로 대답하지는 못했다. 자신이 자신이라는 증명 따위, 누가 할 수 있을까.

-

큰길에서 빨간 불을 만나 걸음을 멈춘다. 옆에 선 남녀가 힐끔힐끔 훔쳐보는 것 같아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다. 육교로 건너려고 계단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러자 이번에는 갑작스럽게 방향을 바꾼 것이 눈에 띈 게 아닐까 진땀이 나 잰걸음으로 계단을 오르게 된다. 몸을 웅크리고 싶었지만 꾹 참는다. 육교 밑으로 구급차가 빠져나간다. 그 사이렌과 적색 등을 물끄러미 눈으로 좇는다. 하는 행동이 죄다 뒤죽박죽에 뭐든 부자연스러워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싫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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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엄마, 살았어? 오줌 마려운 척해서 엄마, 살았어?"

"완전 살았지." 히구치는 고맙다는 표현을 한다. "잘 기억하고 있었네" 하며 다시 코를 긁는 시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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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움직이기는 한다. 이차나 자신과 같은 형편이었다. 움직이고는 있다. 도망치고는 있다. 살아는 있다.

총리가 사망한 폭파사고가 일어난 지 겨우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쩌면 이리 쉽사리 혼란이 가라앉았나 싶어 기가 막히기도 했다. 차가 도로를 달리고, 그 주행으로 바람이 일면서 도로 위의 물건들이 날아올라 중요한 증거가 사라질 가능성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차라리 증거를 없애고 싶은 걸까? 순간, 그런 생각이 스친다.

-

"생각해보면 우리는 말이예요, 멍하게 있는 동안에 법률은 만들어지고, 세금이나 의료 제도는 바뀌고, 그러다 또 어디서 전쟁이 나도 그런 흐름에 반항할 수 없도록 되어 있잖아요. 좀 그런 구조라고요. 나 같은 놈이 멍하게 있는 사이에 자기들 마음대로 다 밀어붙이죠. 전에 책에서 읽었는데, 국가란 국민의 생활을 지키기 위한 기관이 아니래요. 듣고 보니 그렇더라고요."

-

"엄청나게 커다란 고래의 습격을 받으면"

"가장 영리한 방법은"

"도망치는 거."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 곳까지 도망치는 거. 그거 밖에 없잖아요. 국가나 권력을 적으로 삼고 있다면, 가능한 것은 도망치는 것뿐."

"고래한테서 도망치듯이."

-

"시시해." 히구치는 그 말을 실내 천장으로 뿜어내는 연기처럼 뱉어냈다.

"정말 시시하죠." 가즈는 말했다. "그때는 왜 그리 시시한 일로 와와, 신바람들을 냈을까요."

오노 군, 울어? 다쓰미가 놀리듯 말하며 다가오더니 가즈의 눈초리에 고인 촉촉한 물을 닦았다. 가즈는 입술 양 끝을 끌어 올리기는 했지만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영어로 노래를 흥얼댄다.

"비틀즈?" 히구치가 뭊는다. 많이 들어본 멜로디였다.

"골든 슬럼버." 가즈는 노래를 그치더니 말했다. 'Once there was a way to get back homeward'라는 구절을 반복했다. "어쩐지 그런 기분이 들어요.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옛날에는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었는데, 어느새 다들 나이를 먹고."

 옳은 말이라고 히구치는 생각했다. 대학 시절의 느긋했던, 빈둥대기만 하던 무익한 생활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직장인이 되고, 양복을 입거나 제복을 입고 피차 연락도 하지 않게 되었찌만 그래도 제가끔 자신만의 생활을 보내며 살아가고 있다. 성장한 것은 아니지만, 뭔가가 조금씩 변해간다. "아오야기의 인생은, 지나치게 예상 밖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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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이란 게 그렇습니다. 상대의 태도가 나쁘면 심술을 부리고 싶어지지요." 그렇게 말하는 의사의 말투는, 사람의 마음보다는 사람의 피부나 살점에만 흥미를 느끼는 사람처럼 건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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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하는 객기만 부릴 게 아니라, 좀 냉정하게 순서를 밟는 게 인간이라는 동물이야."

옛날에 자신이 했던 말이 다시금 머릿속에 되살아났다."순서를 밟아가며, 생각한다."

지금 내가 가진 무기에는 대체 어떤 것이 있을까. 조용히,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곡 하나하나를 이어 붙여 메들리를 만드는 심정으로, 자신이 가진 정보를 꿰매 붙였다.

인간의 최대 무기는, 습관과 신뢰라고 했던 모리타의 말을 떠올린다.

야, 모리타, 그게 아니라 인간의 최대 무기는, 오히려 웃을 수 있다는 것 아닐까? 그렇게 대꾸해주고 싶었다. 제아무리 곤경에 빠지고 비참한 상황에 놓여도, 그래도 만약 웃을 수만 있다면, 분명 결코 웃을 수 없겠지만, 웃을 수만 있다면 무언가가 충전된다. 그것도 사실이다.

-

이 조명 뒤, 자신을 비추는 카메라 뒤편으로는 수많은 사람이 총리를 암살한 범인의 낯짝이나 보자며 텔레비전을 뚫어져라 보고 있을 것이다. 그중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아오야기를 범인으로 믿고 있는 지는 짐작도 할 수 없다.. 어쩌면 그 사실은 아무려나 상관없는 사람이 대부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범인이냐 아니냐 하는 점은 나중 문제일 뿐, 좌우간 이,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소동을 축구 관전하듯 바라보고 있을 게 분명하다.

어디선가 바이크 달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신문 배달을 하는 바이크이리라.

그렇구나, 하고 아오야기는 새삼 깨닫는다. 지금 이렇게 자신이 엄청난 사태에 직면한 순간에도 신문 배달부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다. 집집마다 신문이 배달되고, 아침이 오며 하루가 시작된다. 회사나 학교로 가 "그 중계 보느라 졸려 죽겠다"라고 푸념을 해대며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생활로 돌아간다. 마치 월드컵 일본전이 끝난 다음 날처럼.

아오야기는 걸음을 멈춘 뒤 양팔을 더욱 번쩍 들고는 가슴을 폈다. 시선을 위로 보낸다. 카메라는 어디에 있을까.

이것으로 적어도, 이 순간까지는 자신이 이곳에 존재했다는 증명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가짜가 아닌 진짜 아오야기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나는 범인이 아니다. 그 진실을. 이 광경을 보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했다.

또다시 바이크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로 달려가는 걸까. 고생이 많으시네요. 하고 낯모를 배달부에게 인사를 건네고 싶어진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디에 계실까. 누명임을 증명할 수는 없었지만, 팔은 흔들 수 있었다.

-

수많은 사람이 끝도 없이 지나쳐 간다. 그 물결을 타지 못하고 남겨진 것처럼 아오야기 마사하루는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아이가 사라진 방향을 다시 한 번 바라본다. 그리고는 왼손을 들어 올려 얼른 마르도록 입김을 후후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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