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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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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2

눈 깜짝할 사이 한 달이 지났다. 학창 시절, 그거 잠깐이라고 한 친척들의 말은 사실인가 보다.

봄으로 시작해 어물쩡하다 보면 여름이 오고, 부채질 몇 번 하면 스산한 바람이 불고, 그러다 그만 눈 내리는 겨울,

그렇게 1년은 후딱 간다더니.

 

p. 47

힘을 주는 것 같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머리 부분과 몸통이 직각이 되었다.

'이렇게 연약해서 죄송합니다.' 하며 스푼이 고개를 조아리는 것처럼도 보였다.

 

p. 83

"이건 나의 지론인데, 옷만으로 멋져 보이긴 어렵지만, 옷 때문에 우스워 보이는 건 순간이라 이거야."

 

p. 100

따지고 보면, 연주하는 밴드나 공연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관객이나

나름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따분한 이상을 견디다 못해 그런 분위기를 타고

남아도는 힘을 해소하는 것뿐이라는 인상이 강해 좋아하지 않았다.

 

p. 106

"금요일이 도리이의 생일이야?"

"응, 맞아. 중학교 때 이후로 변하지 않았다면 말이지만."

 

p. 194

고수의 말에서는 거만함이나 자만심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온화하면서도 신중한, 말하자면 잔잔한 부드러움마저 풍겼다.

 

p. 209

도도는 무지막지하게 자기 서클에 들라는 선배들에게 진저리가 난 것 같고,

미나미는 영어회화 서클에 몇 번 나갔는데 거기 있는 어느 누구도 진득하니 영어 공부를 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만둔 모양이다.

도리이는 테니스와 스키를 하면서 젊은 여자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는,

그에게 딱 들어맞는 서클에 들었다가 결국 볼링 사건 이후 발걸음이 뜸해져 나일론 회원으로 전락했다.

나는 나대로 혹할 만한 서클을 발견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서클에 들지 않고도 이렇게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잖아."

 

p. 236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리이 어머니의 탄식은 컵 속으로 떨어지고,

뿌연 김이 다시 그녀의 얼굴을 뒤덮는 듯했다.

 

p. 245

"기타무라, 나는 모든 이를 위해 모험을 하고 있는데 왜 이들은 무기를 거저 주지 않는 겁니까?

이거 이상하지 않습니까. 식료품도 유료에요! 도대체 내가 누굴 위해 싸우는지 알고나 이러는 겁니까?"

"그래, 네 말이 맞다."

컴퓨터 게임 얘기였다.

 

p. 301

"하지만, 치타와 사슴, 둘 중에 어느 쪽을 구할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잖아?"

니시지마는 그 말에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건 그때 더 가여워 보이는 쪽을 구하면 됩니다."

"그건 너무 주관적인 거 아냐?"

내가 웃었더니 "안됐지만, 나를 움직이는 것은 나의 주관입니다."

하고 궤변인지 변덕인지 분간 안 되는 대답이 돌아왔다.

 

p. 318

'팔리는 소설의 조건'과 신기하게도 일치했다.

유머와 가벼움, 지적인 내용, 유려한 필치에 알맹이는 없는...

 

p. 351

그러고 나서 나는 만두를 집어 먹엇다. 잘게 썬 부추의 향과 저민 고기의 감촉이 입안 가득했다.

그런데 완탕면의 완자나 만두는 그 맛이 그 맛이라 괜히 같은 걸 두 개 시켰구나 싶어 손해본 기분이었다.

 

p. 366

처마 밑에서 잠든 고양이처럼 온화한 표정

 

p. 387

인생살이에 그런 게 없잖아. 체크 포인트라든지, 확실한 방법이라는 건 없다고.

말 그대로 자유 연기야. 그러니 누가 '이 수행을 하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라거나

'이것만 참으면 행복해집니다.' 라고 하면 차라리 홀가분하게 느끼게 되는 거 같아.

아무리 괴롭고 인내가 필요하더라도 이것만 하면 행복해진다는 지표가 있으면 고민할 게 없지.

하지만 우리들은 어릴 때부터 해야 할 일이 딱딱 정해져 있었잖아.

그러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이제부터 '알아서들 하시오.' 라고 하니 멍해지는 거지."

 

p. 401

이제 와서 도도 같은 플러스 전기만 가진 인간이 내게 다가오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겁니다.

 

p. 417

그의 말대로 물빛 하늘에 붓으로 흰 물감을 점점이 뿌려 놓은 것만 같은 구름은,

풀을 뜯는 양 떼와 꼭 닮아 아름다웠다.

 

p. 501

"그런 다음 평소처럼 웃고, 평소처럼 뻗친 머리를 매만지면서 또 한마디 했다.

"안심하셔. 나한테는 미나미밖에 안 보이니까."

 

p. 524

"추억은 만드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추억이 되는 거야.

세월이 흘러 어느 날 떠올려 보면 추억이 되어 있는, 그런 거야."

 

p. 599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그 시절은 참 좋았지, 오아시스였지 하면서

현실도피적인 생각일랑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인생을 보내선 안 된다.'

 

"인간으로서 누릴 최대의 사치란, 인간관계의 풍요로움을 말한다."

 

p. 602

도리이를 비롯한 친구들과는 한동안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겠지만

점차 자신의 역할과 일상에 휘둘리다 차츰 그것도 소원해질 것이다.

나는 원거리 교제를 계속하기에 지쳐 하토무기 씨와 반년도 지나지 않아 헤어지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서 또 몇 년이 지나면, 이 친구들과 보낸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가 참 그립다.' '그런 일도 있었지.' 하며 오래전에 본 영화 얘기를 할 때처럼 읊조리고,

결국 우리들은 그렇게 뿔뿔이 흩어져 묻힐 것이다.

글쎄, 뭐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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