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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 오듀본의 기도(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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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살이, 누구에게나 딱 한 번 뿐이다. 사는게 즐겁지 않다거나 슬픈 일이 있더라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시작할 수는 없다. 안 그러냐? 모두들 한 번 왔다가 가면 그걸로 끝이야. 알겠니?"

할머니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가는 수 밖에 없다."

가족이 죽어도, 죽고 싶을 만큼 슬픈 일이 있어도, 기형의 몸을 가지고 태어났어도, 그래도, 그렇더라도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인생이기 때문이라고.

"할머니는 알았대요."

"뭘요?"

"받아들이는 법을요."

드럼통같은 몸에서 발하는, 토끼의 말은 빗물이 젖어 들듯 내 몸에 스며들었다. 받아들이는 법.......

-

"왜 그런 경우야 흔하지 않나. 예를 들면, 빙글빙글 도는 진자는 돌리던 손을 놓아도 계속 같은 방향으로 돌지. 그와 마찬가지지. 노상 돌고 있던 쪽은 멈춰야 할지 어쩔지 판단할 수가 없는 거야."

암, 암, 하면서 그는 자기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엔 "한참 동안 무거운 짐을 들고 있다 보면 손에서 내려놓고 나서도 한동안 들고 있는 기분이 들지. 그것과 마찬가지야." 라는 말도 했다.

그건 좀 다른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했지만, 도도로키 스스로는 꽤 만족하는 것 같아 그냥 잠자코 있었다.

-

"이제부터 사실을 말하겠다고 선언한 다음에 한 대답이야. '관련 있다.'고 말한 건 그러니까 사실이겠지. 따라서 저 사람은 유고의 죽음에 관련이 있는 거지."

나는 "잠깐만요." 하고 손을 치켜들었다.

"저 사람은 자기가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진실을 거꾸로 말한 걸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선언하기는 했지만 '관련 있다.'는 것은 결국 '관련 없다.'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고요."

"그런 거라면 선언의 의미가 없잖아."
"아니, 그 이전에. 소노야마 씨가 '이제부터는 사실만을 말하겠다.'고 선언한 것 자체가 '이제부터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

"지금 너는 '야경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잖아. 네가 알고 있는 야경이란 건 뭔데?"

그는 복잡한 감정을, 얼굴에 드러냈다. 시골사람이 자기 고향 풍습을 쑥스러워하며 설명하는 것처럼도 보였고 자기 고향만의 명물을 은근히 자랑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밤이 진짜, 라고 그는 말했다.

밤을 즐기는 것이 야경을 즐기는 것이다. 별과 밤과 그리고 새까만 바다, 바로 그러한 것들이 밤의 풍경이 아니냐고 그는 조용히 말했다.

밤이 깊어갔다. 올빼미의 울음소리도, 귀뚜라미의 날갯짓 소리가 나는 것도 아니다. 섬 전체가 그저 숨을 꼭 참고 있는 것 같다.

-

나는 권선징악을 컨셉으로 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나쁜 짓을 하면 반드시 천벌을 받는다.'는 옛말을, 나는 좋아한다. 왜냐하면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

"뭐하니?"

말을 걸어 보았다.. 이 섬에 와서 내가 변한 점이라면 낯선 상대에게 선선히 말을 걸게 됐다는 것이다. 소년은 나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잔가지를 마디마디 쳐낸, 아주 곧은 나무였다.

-

"야스다 자식이 말한 것이, 사실일까?"

히비노는 좀 전까지의 흥분이 말짱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스다가 지껄여댄 말을 히비노는 마음에 둔 것이다. '가요코가 너를 갖고 놀았다.' '근본적으로 너는 사람들이 가엽게 여기기는 해도, 가까이 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런 말들은 그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됐을까. 나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어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 지 모르겠다.

-

그는 지금 그럴 만한 여유가 없는지도 모른다. 가요코 씨의 일, 죽은 부모의 일, 어린 애들도 믿지 않는 섬의 전설, 그리고 조금 전 야스다의 폭언, 그런 일들이 그의 머릿속에 꽉 차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는 상처를 받으면서도, 서 있구나 나는 생각했다. 악의에 공격받으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의연하게 서 있는 그는 훌륭하다. 나와는 다르다.

-

"인생이란 줄서기와 같은 거야. 안 그래? 길게 늘어선 행렬이란 말이야. 자기도 모르는 새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가서는, 어느 틈엔가 맨 앞에 서게 되는 거지."

-

지하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앞에 섰을 때까지는 분명히 지하 요새가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는데, 결국, 그 생각은 틀렸다.

계단은 칙칙한 회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사자나 천사 따위의 장식은 전혀 없었다. 휘휘 돌아 내려가는 나선형도 아니고, 몇 칸만 내려가면 곧바로 끝인 짤막한 계단이었다.

-

"내가 쏜 화살이 분명히 과녁에 명중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전혀 엉뚱한 바닥에 꽂혀 있는 것을 보면 허망하지 않겠어요?"

"그럴 때는 말이야."

히비노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떨어진 장소에 과녁을 그려 넣으면 되지."

-

"처음부터 유고라는 허수아비는 없었던 게 아닐까? 우리들 모두가 한 치의 의심 없이, 말하는 허수아비가 있다고 믿었던 건 아닌가 이 말이다."

-

"섬 사람들 전부에게 그런 게 아닐까요? 지금까지 미래를 보면서도 못 본 척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을 사과하고 싶었을 겁니다. 제일 먼저 유고는 소노야마 부인에게 사죄하고 싶었던 거죠."

확신은 없었지만 내 생각을 말했다. 소노야먀 부인의 임종이 가까워 온 것은 유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침대에서 자리보전하고 누워 있는 그녀와 만나지도 못하고 사과도 하지 못한 채 끝내는 것이 그는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소노야마에게 부탁한 것이다. 허수아비는 걸을 수가 없다.

-

축제가 절정에 달했을 때 정신없이 춤을 추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였다는 것을 깨닫고는 밀려든 고독감에 온몸이 얼어붙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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