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디즈니 플러스를 구독하면서, 그동안 보고싶었지만 놓쳤던 영화들 -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 루카, 엔칸토 등을 싹 다 시청했다.
물론 모아나나 겨울왕국처럼 한 번 더 보고싶었던 영화들도 재주행하고~
그렇게 많은 애니메이션을 싹 훑는 와중에 가장 좋았던, 기억에 남는 영화를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엔칸토를 고르겠다.
우선은 영상미, 비주얼이 환상적이다. 스틸컷만 봐도 끝장나는 빛 사용에 황홀해진다.
촛불로 대표되는 마드리갈 가족의 마법이 펼쳐질 때마다 따뜻한 노란 빛을 사용하는데 이 빛이 퍼지고 부서지고 반사되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이제는 거의 실사 영화같은 애니메이션 기술의 발전도 한 몫 한다. 겨울왕국 때에는 디즈니에서 자체 눈 물리엔진을 개발했다더니, 이번에는 치마 움직임에 대한 물리엔진을 만들어서 영화 내내 캐릭터들의 펄럭이는 치마 자랑을 볼 수 있다 ㅋㅋ
그리고 사운드 트랙이 너무너무 좋다!
겨울왕국의 Let it go나 Into the Unknow처럼 영화를 강렬히 대표하는 곡이 없어서인지 한국에서는 겨울왕국만큼은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사실은 엔칸토의 사운드트랙 We don't talk about Bruno가 역사상 이례적으로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3주째 1위를 차지하고 있을만큼 온 세계가 엔칸토의 음악에 열광하고 있다.
아무래도 가족 이야기이다보니 단 하나의 메가 주제곡을 내세우기보다는 모든 가족 구성원의 주제가에 힘을 고루 실은 느낌인데, 미라벨의 Waiting on a Miracle, 루이사의 Surface Pressure, 이사벨라의 What Else Can I Do 등 각 가족 구성원을 잘 표현한 곡을 딱 적재적소에 잘 배치했다고 생각한다.
콜롬비아 배경의 영화답게 출연진들도 콜롬비아계 배우들로 구성되었는데, 특히 주인공 미라벨 역을 연기한 배우가 브루클린 나인나인에서 무뚝뚝한 형사 로사 디아즈 역을 맡았던 스테파니 비아트리즈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한바탕 충격을 받았다.
아니 이미지 너무 다르잖아요~
이번 기회로 인터뷰며 SNS 영상들 보게 됐는데 이 깨발랄함 누르고 브나나에서 낮은 톤으로 무표정 연기 어떻게 했나 싶다.
이것이 배우..라는 것일까?
■ 스포일러 없는 간략한 줄거리
콜롬비아 산 속에 위치한 작은 마을 엔칸토, 마을의 중심에는 마법을 이용해 사람들을 도우며 엔칸토 전체를 이끌어가는 마드리갈 가족이 있다.
마드리갈 가족은 마법의 힘을 가진 신비한 집 까시타에서 모두 함께 살아가는데,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태어나 어린이가 되면 마치 성인식을 치르듯 마법을 받는 의식을 치르게 된다. 그리고 까시타는 마법을 받은 아이에게 마법에 꼭 맞는 자기만의 방을 새롭게 선물해준다.
하지만 초능력 가족 영화에서 으레 그렇듯 주인공 미라벨 마드리갈은 초능력이 없다 ㅜㅜ 늘 씩씩한 척 했지만 특별한 가족 속에서 혼자 상처받아 온 미라벨.
어느 날 엔칸토의 마법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미라벨은 평범한 자신이 나설 때라고 생각하는데..! 과연 미라벨은 엔칸토의 마법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 여기서부터 스포 있는 감상문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나 역시 이 영화에서 여러 전형적인 캐릭터들을 일부러 배치한 뒤 그 전형성을 부수고 비틀었다는 점이 참 좋았다.
우선 가볍게는, 초능력물에서 혼자 초능력이 없는 주인공이 "알고보니 최강의 방어 능력자..?"가 아니어서 좋았다.
왜 영화를 보다보면 여기서는 이럴거야 짐작하게 되는 클리셰들이 있잖은가? 무너진 까시타를 '갑자기 폭발하듯 발현된 미라벨의 마법'이 아니라 평범한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모두 함께 복구했다는 점이 참 좋았다고 생각한다.
또, 완고하고 차별적인 할머니가 주인공의 성장을 저해하는 그저 그런 악역이 아니어서 좋았다. 할머니는 어린 시절 가족을 잃고 절망에 빠진 순간 기적적으로 마법을 얻었다. 이는 분명 행운이었지만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라 할머니는 한 순간에 가족 뿐 아니라 마을 전체를 혼자 이끌게 되었다. 그리고 리더란 원래 독선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과정 전반을 시간을 들여 보여주었고, 또 마지막에 미라벨과 함께 할머니 역시 성장함으로써 이 서사를 완성해냈다.
루이사는 차녀로 설정되었지만 집안, 나아가서 마을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리고 있다. 나를 비롯해 많은 요즘 시대 장녀들이 루이사에게 공감할 것이다. 나 역시 나이차 있는 동생을 돌보며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집을 돌보고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당부를 숨쉬듯 들으며 자랐기에 루이사가 자신도 사실은 모든 것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며 노래할 때에 공감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이사벨라는 한국에서는 지금보다는 조금 이전 세대의 장녀 역에 가깝다. 이사벨라는 가문을 위해 완벽히 예쁘게 포장된 채 원하지 않는 가문의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 지금도 돈 때문에 원하지 않는 결혼이 강압적으로 이뤄지는 나라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 그렇게 구시대의 이야기도 아니다. 디즈니 영화는 전 세계 시청자를 위한 것이니까. 이사벨라와 미라벨의 노래를 통해 사람들이 완벽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고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중후반부까지 무서운 악역으로 묘사되는 브루노는 디즈니가 늘 빌런 역할을 주던, 자파나 스카와 같은 전형적인 라틴 계 외모의 인물이다. 그런 브루노에게 유약하고 착한 성정과 선역을 반전요소로 부여함으로써 디즈니가 오랜 시간 쌓아온 편견을 조금이나마 만회하려 애썼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를 들어 라이온 킹의 영웅 심바는 아프리카 계 혈통의 캐릭터임에도 백인으로 코딩되도록 일반 미국 악센트를 사용했으며, 악역인 하이에나들은 라틴계/아프리카계 악센트를 사용하고 심지어 스카는 극 중에서 유일하게 검은 갈기를 가진 사자이다.)
얼마 전에 디즈니+로 다큐멘터리 숨겨진 세상: 겨울왕국2 메이킹을 보면서 요즘 디즈니 애니메이션 하나를 만드는 데에 얼마나 많은 작업과 인력이 투입되는지 보고 새삼 놀랐다. (디즈니 정말 대기업이구나!)
이러니 작품이 점점 발전할 수 밖에~ 안 그래도 한국계 애니메이터들도 크레딧에 이름이 많이 보이던데, 동남아 배경의 라야가 나왔듯이 언젠가는 한국 배경의 디즈니 애니메이션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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