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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feel

굿 플레이스, 가장 이상적인 사후 세계 [넷플릭스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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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사랑하는 드라마, 몇 번이나 정주행을 마친 드라마는 바로 넷플릭스 「굿 플레이스 The Good Place」이다.

사실 정주행이라는 단어가 의미가 없는 게, 이제는 작업을 할 때마다 BGM처럼 듀얼모니터에 굿 플레이스를 틀어두고 있다.

사후세계와 윤리학을 다루면서도 이를 너무 무겁지 않게, 웃으면서 가볍게 볼 수 있는 적당한 무게감으로 풀어가는 연출이 놀랍다.
편당 20분으로 구성되어 언제든 부담스럽지 않게 재생할 수 있고, 코미디 시트콤이면서도 약간의 긴장감을 유지하며 끝에는 나름 충격적인 반전 요소도 담고 있어 이 드라마를 처음 보던 시절에는 도저히 중간에 시청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게 편당 20분인 게 의미가 있나? 어차피 시즌 통째로 다 보게되는데' 생각했었다.

겨울왕국 안나 성우인 크리스틴 벨(엘리너 역)로 대표되는 배우진의 딕션이 워낙 좋아서 영어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쉐도잉하기 좋은 미드로 손꼽히기도 한다. 사실 나도 굿플레이스 시즌1 대본을 구해서 쉐도잉을 했었는데.. 2화 중반까지 했었나..? ㅎㅎ 올해 다시 도전해볼까봐.

 

 


■ 스포일러 없는 간략한 줄거리

 

미국 피닉스 주에 살던 엘리너, 어느 날 새로운 방에서 눈을 뜬다.
Welcome! Everything is fine. 이라는 벽지의 안내를 보고 일단 마음을 편히 먹는데.
굿플레이스 설계자인 마이클의 안내를 듣고 자신이 교통 사고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행히 생전의 선행 덕분에 일종의 천국인 '굿 플레이스'에 도착해 이제는 완벽한 이웃과 소울메이트와 함께 즐거운 사후 세계를 누릴 일만 남았다!

그런데.. 사실은 엘리너가 굿 플레이스에 배정된 것은 실수였다.
엘리너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성격으로 그의 삶은 선행과는 거리가 멀었고 실은 배드 플레이스 소속이었던 것이다..
온갖 고문이 자행되는 전형적인 지옥 배드 플레이스에 가고 싶지 않았던 엘리너는 사후 세계의 실수를 비밀로 하고 굿 플레이스에 머물기로 한다.
그리고 생전에 윤리철학 교수였던 소울메이트 치디에게 윤리학을 배우며 진짜로 굿 플레이스에 어울리는 좋은 사람이 되려 하는데.
과연 엘리너는 모두를 속이고 굿 플레이스에 머물 수 있을 것인가?

 

 

 


■ 여기서부터 스포있는 감상 이모저모

많이많이 사랑하는 굿플레이스 크루


시즌1부터 4까지 굿플레이스 크루의 모든 여정을 좋아하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순간은 이 드라마의 마지막, 크루들이 우여곡절 끝에 진짜 굿 플레이스에 당도한 이후의 이야기이다.

굿 플레이스에서의 '굿 플레이스' 묘사는 내가 상상하던 천국의 이미지와 그에 대한 한계를 거의 그대로 보여주었다.
누구에게나 팍팍한 요즘, 나의 삶 역시 언제나 쉬운 적 없었고 나는 삶과 죽음, 그리고 사후 세계에 대해 많은 상상을 해왔다.

과학도로서 사후 세계라는 것은 없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러면 불공평한 조건 속에서 태어나 그저 삶을 견뎌낼 뿐인 내 인생이 너무 허무하지 않아?
꼭 보상받고 싶어서라기보다 알 수 없는 저 너머에 대한 기대가 있을 때 삶에 더 활기가 돌기 때문에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사후 세계를 상상하는 거겠지.

만일 동양의 사상처럼 우리가 끊임없이 윤회하는 거라면, 이 삶이 끝나도 다음 삶, 또 그 다음 삶 속에서 고통받게 되는 건가? 생각만 해도 벅차 그 길은 쉽게 따르기 망설여진다.. 그렇다고 한 번의 삶으로 천국과 지옥이 갈리는 서양 종교를 믿자니 그건 너무 나이브한 거 아닌가 싶다.
굿 플레이스 제작진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내가 굿 플레이스의 사후 세계 시스템이 완벽하다고 느끼는 것은 아래 3가지 이유에서이다.

 

1. 천국에서는 제약없이 원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시즌4 중에서도 나는 타하니가 1000개에 달하는 버킷리스트를 모두 해치우는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많다. 타하니처럼 목공도 배우고 싶고, 마이클처럼 악기도 마스터하고 싶고, 치디처럼 원없이 소설도 읽고 싶고 그리고 제이슨처럼 춤도 배우고 싶다. 하지만 돈도, 시간도 체력도 부족하다. 세상에 하고 싶은 것, 재미있는 것이 이렇게나 많은데 시간과 체력이 있을 때에는 돈이 없고, 돈과 체력이 있을 때에는 시간이 없고, 시간과 돈이 있을 때에는 체력이 없으니 이렇게 슬플 수가 없다.
내가 가장 건강할 때, 내가 가장 원하는 모습을 택해서 그 어떤 제약도 죄책감도 없이 배우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배울 수 있다는 것, 내가 상상하는 천국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다.

 

2. 삶의 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드라마 굿 플레이스에서 처음 그려진 천국은 진짜 '천국'이 아니었다.

선사시대에 죽은 사람들부터 현대에 죽은 사람들까지, 모든 죽은이들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파티 속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무한히 제공받지만 딱히 행복하지 않다. 불행하지는 않더라도 정말로 딱히 행복하지 않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고 결핍이 있어야 충족이 있는 법. 무한히 채워지기만 하는 욕구는 곧 무자극이 된다.
그래서 굿 플레이스 크루는 천국에 또다시 '끝'을 도입한다. 끝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다시 모든 행동에 활력이 도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생각해보면 지금 내가 불안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나의 끝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얼만큼의 삶을 준비해야 하는 걸까? 가끔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로 영원히 사는 것보다 당장 내일 죽더라도 확실히 죽음을 아는 것이 마음 편하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3. 지옥은 처벌이 아니라 사람을 발전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너무 많고 그들은 현실에서 합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모두들 사후 세계가 그런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내가 어떤 죄를 지어 지옥에의 기준점을 넘었고 이후로 어떤 짓을 해도 그것을 돌이킬 수 없다면 그 누가 더 나은 행동을 하고 싶을까? 드라마에서는 지옥에 갈 것이 확정되었음에도 주인공 크루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선행을 도왔지만, 현실에서는 나쁜 사례가 더 많을 것이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지고, 하지만 명확한 기준이 있어서 자신의 단점을 극복해낸 사람들끼리만 천국을 원하는 만큼 누린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후 세계 중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훌륭하다.

 


아마 나는 평생 진심으로 한 종교를 믿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사후 세계를 꿈꿀 수는 있지 않을까?
나의 사후 세계를 책임질 종교는 드라마 굿 플레이스로 정하련다.
현실이 버거워 원하는 것을 포기해야 할 때에는 굿 플레이스에서 버킷리스트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견디고, 큰 실수를 해서 죄책감에 발목잡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그만두고 싶어질 때에는 어차피 배드 플레이스에서 반성할 기회가 또 있으리라 생각하며 주저앉지 말아야지.
부디 굿 플레이스 제작팀에 현실 '더그 포셋'이 있어서, 어느 날 죽고 눈을 떴을 때 다 괜찮다는, 굿 플레이스의 안내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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