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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feel

돈 룩 업, 낭만적인 멸망과 현실적인 리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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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COVID-19)가 퍼지기 시작한지도 벌써 3년째다.
처음에는 조류독감이니 메르스니 그동안 있었던 여러가지 전염병과 비슷하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죽고 이동이 제한되고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되고 주식이 폭락하고, 이렇게 온 지구가 영향을 받을 줄은 정말 몰랐다.
이렇듯 전염병이 창궐하고, 평균 기온이 올라 빙하가 녹고 동물들이 멸종하고 식량 재배에 실패하고, 지진이 일어나고 여기저기 산불이 나는 와중에 전쟁까지. 어쩌면 지구는 정말 멸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기후학자들은 아무리 조건을 바꿔가며 실험해도 2050년의 지구가 생물이 살 수 없는 행성이라는 시뮬레이션 결과에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기후학자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멸망이 30년에 거쳐 서서히 진행되고 있기 때문일까?
현실의 멸망은 조금도 낭만적이지 않다. 많은 픽션에서는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거나, 자연 재해가 일어나거나, 외계인이 침공하거나, 좀비 바이러스가 들끓거나 하는 커다란 한 번의 사건으로 인해 한 방에 깔끔하게 지구가 멸망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서서히 진행되는 멸망 속에서 누군가는 맞서고 누군가는 견디고 누군가는 포기하며 계속 힘겨운 삶이 이어진다. 마치 병원 침대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시기를 늦추기만 하는 현대의 죽음이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것과 같다.


영화 <돈 룩 업 Don't look up 2021>은 다시 한 번 이런 멸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근데 장르가 포스트 아포칼립스나 재난 영화가 아니라 블랙코미디이다.
낭만적인 멸망, 깔끔한 종말 혜성 충돌을 다룬 영화 <돈 룩 업>은 왜 코미디 장르로 분류되었을까?


■ 스포일러 없는 간략한 줄거리

천문학과 대학원생 케이트 디비아스키(제니퍼 로렌스 분)는 어느 날 새로운 혜성을 발견하고 몹시 들뜬다.
세계에서 최초로 혜성을 발견하다니, 얼마나 명예로운가? 정말 최초 발견이라면 혜성에 자신의 이름이 붙을 수도 있다!!
한껏 신나 지도교수인 랜들 민디 박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에게 찾아간 케이트, 랜들도 케이트의 발견을 축하하며 랩실 학생들 전원과 함께 혜성의 궤도를 계산해보기로 한다. 근데 계산해보니 그 혜성이 지구로 오고 있다. 남은 시간은 고작 6개월. 아무리 계산해봐도 결과는 동일하다.
케이트는 랜들과 함께 이 소식을 나사에 전하고, 국방부에 전하고, 그리고 백악관에서 대통령에게도 전해보지만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정부가 침묵한다면 직접 나서겠다며 두 사람은 언론에 나가 지구 멸망 소식을 알리지만 이번에도 대중들은 믿지 않고, 인터넷에서는 케이트와 랜들의 영상을 개그 밈으로 만들어 조롱하기까지 한다.
지구 멸망까지 반 년 밖에 시간이 없는데, 기업과 정치인들은 이걸 자신의 이익과 선거를 위해 이용하려고만 한다.
정말 이대로 지구는 멸망하는 걸까..?


■ 여기서부터 스포 있는 감상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초호화 캐스팅


내가 처음 이 영화를 접한 것은 SNS에서 떠돌던 아리아나 그란데(극 중 가수 라일리 역)의 무대 클립을 통해서였다.
기후 위기와 멸망에 관한 가사를 감미롭게 부르는 모습에 나는 아리아나 그란데가 SNL과 같은 풍자 예능에 출연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영화 속 한 장면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영화를 보고나서 처음에 언급한 기후학자들의 경고가 떠올랐다.
지구 멸망이 확정이라는데, 아무리 시뮬레이션을 돌려도 결과는 같다는데. 멸망까지 최대 30년이고 시기는 얼마든지 단축될 수 있다는데.
그런데 나부터도 그들의 말을 믿지 않고 있다. 과학 기술이 이렇게 발전했는데 뭔가 방법이 있겠지, 누군가는 막을 수 있겠지, 나이브하게 생각하면서.

그럼 30년이 아니라 만일 영화에서처럼 6개월 후 지구가 멸망한다면 뭔가 다를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돈 룩 업 영화를 보면서 케이트와 랜들이 대책없이 언론에 멸망 건을 터뜨릴 때 불안했던 건 아마 나 뿐이 아니었을 것이다.
기존 영화, 특히 인간 본성 어쩌구 하는 한국 영화의 공식을 따른다면 멸망을 전하는 순간 모두 서로가 서로의 것을 빼앗고 강탈하는 잔인한 아수라장이 펼쳐질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그 대신 돈 룩 업은 가장 현실적인 반응을 내놓았다. 지금 우리가 기후학자의 말을 믿지 않듯이, 아무도 천문학자의 말을 믿지 않게 만든 것이다.

만일 내가 영화 속 인물이었다면,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지친 몸으로 SNS를 켰는데 6개월 뒤 지구가 멸망한다는 소식을 읽었다면?
나라면 가장 먼저 그 사실이 사실이기를 바랐을 것이다. 한 방에 깔끔하게, 먼저 죽는 사람도 남겨지는 사람도 없게, 아무도 슬프지 않게 모두 함께 깔끔한 멸망을 맞이하기를. 하지만 사실이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멸망 소식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시간이 흐르며 많은 과학자들로부터 멸망을 재차 확인받은 다음에도 나는 툴툴거리며 회사에 출근할 것이다. 멸망만 믿고 모든 것을 내려놓기엔, 멸망하지 않았을 때의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만일 나사가 혜성 격추에 성공한다면? 그래서 지구가 멀쩡하다면? 그러면 무단 결근으로 회사에서 징계를 받거나 재취업을 위해 취업 시장에 뛰어들어야 하는데 과연 내가 그걸 견딜 수 있을까?
아마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일상을 이어가다가, 하늘 위로 떨어지는 멸망을 직접 목격한 후에야 집에서 가족들과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겠지, 꼭 영화에서처럼. 그 외의 시나리오는 아무리 고민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요즘 세상에서는 예견된 종말도 확정이 아니니, 현대인들이 늘 불안을 달고 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cf. 만일 내가 용기가 있어서 모든 것을 때려치고 6개월간 버킷리스트만 깨면서 살면 어떨까 생각해봤다.
그런데 예기불안 지수가 가장 높은 내가 출근하지 않기로 했다면 아마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파업한 상태일텐데, 그렇게 생각하면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
대중교통 운전사도 비행기 조종사도 모두 일을 하지 않으니 멀리 여행을 갈 수도 없고, 고작해야 주유해둔 기름이 떨어지기 전까지만 차를 몰 수 있겠지. 어차피 나가봐야 음식을 사먹을 수도 없을거고 관광지 체험도 안 될 거고. 결국 집에서 미리 사 둔 음식을 먹으며 살게 되지 않을까?
사실 가장 무서운 것은 통신 서비스와 인터넷의 중단이다. 나는 다행히 가족 가까이에 살기에 찾아갈 수 있지만, 만일 가족이 멀리 살았다면 온라인 네비게이션이 없어 가족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만나지도 못하고, 전화나 메시지로 안부를 묻는 정도도 할 수 없다.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극도의 불안 속에서 6개월을 버텨야 하나? 범죄와 폭동 없이도 충분히, 아니 최고로 무서운 시나리오이다.
어차피 멸망할 거라면 아무도 믿지 않는 편이, 내겐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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