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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 성녀의 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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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그런데 지금 당신이 한 말은 내 마음을 죽였어.


분위기가 좀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둘 다 웃는 얼굴인데, 가식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특히 아야네 쪽이 그런 기척이 강했다. 하지만 히로미는 말을 아꼈다. 그랬다가는 무언가가 무너질 듯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히로미 눈에는 모두가 차분한 분위기를 해치지 않을 만큼만 편안하고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런 매너는 어떻게 하면 터득할 수 있을까, 그녀는 늘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마시바 아야네만 해도 지난 1년 사이에 이런 분위기에 쉬이 녹아들었다.


젊은 기시타니는 새로 들어온 후배에게 선배 행세를 하고 싶은데, 상대가 여자이다 보니 쉽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다행이지 하면서 구사나기는 안도했다. 부인이 나편의 부보를 접하고 달려온다면 그때까지 누구든 남아서 기다려야 한다. 마미야 계장은 그런 일을 대개 구사나기에게 명한다.


아무튼, 누가 봐도 미인에 속하는 여자였다. 화장도 요란스럽지 않았다.


그 장면을 보면서 전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이 사람,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는 것 아닐까.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울 수 없는 사람에게 말이에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아주 똑똑한 여자가 아닐까 싶어요. 똑똑한 데다 인내심도 강한 여자. 화를 내고 상대를 비난해 봐야 얻을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거예요. 오히려 중요한 두 가지를 잃게 될 뿐이죠. 안정되고 평온한 결혼 생활과 우수한 제자, 그 두 가지를요. 

그런 생활을 충동적으로 내던질 만큼 부인은 어리석지 않아요. 양쪽 다 잃지 않으려면 남편과 제자의 불륜 관계가 자연스럽게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 것 아닐까요? 계산이 아니라 방어 본능이죠. 똑똑한 여자 특유의.


히로미, 너지?  나쁜짓을 한 아이를 부드럽게 꾸짖는 말투였다.


아, 농담입니다. 그것도 악질적인 농담이죠. 친구가 죽었는데, 실감하고 슬퍼할 틈도 없이 일에만 쫓기다 보니 신경이 날카로워졌다는 것을 나도 압니다.


유가와는 한쪽 볼로만 웃으며 맛있다는 듯 커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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