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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 룬의 아이들 - 윈터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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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렇게 헤어졌다.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진 채 어린 시절의 선생은 떠나버렸다.
완연한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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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푸르고 깊은 터널로 들어가는 듯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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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앉았던 꽃잎이 페이지 한구석에 작은 얼룩을 남겼다.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찍은 듯한 자국, 바람이 눌러 두고 간 손자국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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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보랏빛으로 빛나는 구름 무리가 하늘 가운데 부챗살 같은 경계를 그으며 뻗어나갔다. 신의 다섯 손가락처럼 찬란한 곡선들, 그 사이에 말갛게 젖은 푸른 구름들이 번져 있었다. 하늘 전체에서 거대한 커튼을 걷기 직전인 것 같았다. 커튼 너머는 낮의 세계, 안쪽은 밤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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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가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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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돌멩이 세 개를 다루듯 저희 식구를 다루었습니다. 

그의 가슴 속에서 저희 세 사람이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정말로 완벽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를 죽였습니다, 다시는 살아날 수 없도록.

 

마음 속으로 저질러지는 어떤 살해는, 어떤 면에서 산 자에게 저질러지는 것보다 더 잔인합니다. 

그곳에는 시체는커녕 한 조각의 감정조차 남지 않게 되며 환생은 꿈도 꿀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텅 비어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 자리를 대신 메우는 것은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질러지는, 비명과 같은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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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처럼 생긴 시동들을 좋아하면서 가끔은 그들에게서 남성적인 매력도 느끼고 싶어하는 악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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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잘 기억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당신 역시 나를 기억할 수 있겠느냐고 묻고 싶은 기분이었다. 

지금의 나를, 지금의 이 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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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 편해지라고 얘가 굳이 널 때리기까지 해야 한단 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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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가리지 않고는 도저히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머리가 뜨거워지고, 가슴 속에 뭉쳐져 있던 단단한 응어리 같은 것이 목을 타고 솟아 나오려 했다. 숨을 죽여 그것을 억눌렀다. 말없는 사람들,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들, 아니,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그를 비참하게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심장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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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네 형이 아버지 대신 너를 사랑해 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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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임은 과감함이 핵심이야. 아버지가 예전에 말해 줬어. 버릴 돈이라면 아예 손이 닿지 않을 곳으로 내팽개쳐 버려라, 미련 남지 않게. 이것도 똑같아. 총점을 비교해서 1점이라도 높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큰 점수가 나는 칸을 굳이 아껴서 뭐하니? 그러다가 한두 번 질 수도 있겠지만 결국 최종 승률에서는 앞서게 된다고.

 

좋은 말이야, 네게는 적당한 방식일 거야.

네가 아버지 이야기를 했으니 나도 하나 할까. 오래 전에 돌아가신 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해 주셨지.

판을 뒤집을 최후의 한 수(추)는 반드시 남겨 놓아라.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기면 모두 이긴 것이다.

 

왜 마지막으로 이기면 모두 이긴 거야? 다음 게임을 해서 상대가 이길 수도 있잖아


다음 게임은 없어, 이기는 순간 상대를 죽여버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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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핏줄의 본성이 서서히 눈뜨고 있었다. 트라바체스 사람은 대가 없이 화해하지 않는다. 

명백한 적은 오래 걸리더라도 반드시 친다. 지금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다음과 그 다음을 노린다.
그리고 결코 잊지 않는다.
 

그가 묻어두려 했던 진네만의 이름은 내킨다고 멋대로 내던져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년 시절의 그는 어느 이름이나 취할 수 있고 어느 땅에서나 비슷한 모습으로 자라지만, 

성장하면 결국 트라바체스의 진네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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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승리자이고 너는 패배할 것이니 네가 나를 승리자답게 예우한다면 나도 온화한 처분을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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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길은 이미 한 번 교차되었고 이제 더 이상 부딪치지 않는 방향으로 각각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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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사랑하고 지킨다는 것은 그만큼 타인에게 배타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게 된다는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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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지 않고 / 늘 새로운 푸른 곶을 가리켜 보이니 / 따를 수 밖에 없는 그대 / 함께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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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두 팔로 커다란 동그라미를 만드는 것을. 그것의 의미를 알아 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그녀 한 명 밖에 없었다.

'여길 보세요.' 아아, 바라보고 있다. 이보다 더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바라보았다.

저 멀리 소년이 오른팔을 펴는 것이 보였다. 거기에 왼팔을 구부려 겹치는 것, 그것은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아무도 보지 않는 바다 위였다. 이솔렛의 뺨을 타고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견딜 수 없게 된 그녀도 손을 올렸다. 그리고 같은 모양을 그렸다. '네 곁에 있고 싶어,'


말로는 감히 하지 못했던 그들도 이 순간만은 너무나 솔직했다. 보리스도 목이 메어오는 걸 느꼈다. 얼마나 곁에 있고 싶었던가. 날마다 그녀의 눈빛과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시절은 한 계절도 못되는 빛처럼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보리스는 다시 두 손목을 교차시키며 팔꿈치를 마름모꼴이 되도록 만들고 높이 올려 보였다. 

그것의 뜻은, '약속하겠어요.' 무언의 대화는 그 어떤 말보다도 강했다. 진심보다 더 한 진심이었다.

폭풍같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제멋대로 휘몰아갔지만, 보리스는 말없이 팔을 올리며 입안으로 뇌었다.

'당신을 위해서, 살아가겠다고.'  이솔렛이 대답하는 것이 보인다. 눈앞이 흐려져 잘 보이지 않아 급히 눈을 비볐는데

내용을 보고 다시 흐려져 버렸다. '잊지 않아.' 바람이 눈물조차 흩날려갔다. 왜, 이제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 걸까

보다 일찍 전할 수 있었다면, 이 벅찬 마음으로 무엇이라도 말하고, 무엇이라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 순간, 그들이 가진 짧은 수신호들만으로 말하기 위해서는 가식도, 망설임도 섞일 수 없었다.

이솔렛이 처음 가르쳐주며 말했던 것처럼 그것은 무언의 찬트였고, 말할 수 없기에 더욱 간절한 기원이엇다.

배는 멀어지고 있고, 시간은 잡을 수 없고, 그리고,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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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담기조차 힘든 새파란 빛이 하늘과 바다 모두에서 쏟아져 내렸다.

그 사람을 기다려도 좋다는 것 하나 때문에 모든 세상이 달라 보였다.


드디어 수신호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배가 멀어졌다.

그는 손을 내리고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아두려는 것처럼 오래도록 응시했다.

멀어지고 더 멀어져 작은 점조차 사라질 때 까지. 그것은 어쩌면 영원한 이별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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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맑다. 서부 아노마라드는 2월 말부터 봄이었다.

 남서쪽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내려오는 파노자레 산맥 줄기 끝자락에 네냐플 학원이 있었다. 높다란 석조 탑 네 개가 서로 마주보고 솟은 것이 보인다. 묵은 담쟁이덩굴로 메워진 탑의 석벽은 오래되어 닳은 듯 바랜 갈색이었다. 탑과 탑 사이를 연결하는, 마치 다리처럼 보이는 복도는 북탑 하나에만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남쪽 탑 너머에 자리잡은 조그마한 숲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초록빛 토끼가 웅크린 것처럼 보인다. 서쪽 탑 너머 사면에는 골짜기가 있다. 그 아래로 가파른 비탈을 내려가면 꽤 큰 강이 있는데 학원에서 설치한 선착장이 있어서 북부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야플리아 가도를 따라왔다. 그 길은 학원입구까지 이어진 너른 평원 '고양이 등'에서 끝이 났고, 거기서부터는 좁은 소로가 학원 입구로 이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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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세 번,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 있었다. 빛나는 태양을 안고 내려오는 날개, 크고 새하얀 새였다.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새였다. 흰 새의 공주, 요즈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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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한없이 날아서 그 사람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있는 새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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