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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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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31

특별히 그 두 사람과 의기투합했다기보다는 가까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는 쪽이 옳겠지만.

만난지 얼마 안 되어 취미나 기호도 제대로 모르는 채 서로를 가로막고 서있는 장벽을 더듬는 느낌이었다.

자연스러운척하면서도 실수같은 걸로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지 않도록 전전긍긍한다.

신선하다면 신선한 거고, 즐겁다고 한다면 즐거운 것일 수도 있겠지만 역시 피곤하다면 피곤했다.

 

p.138

"삶을 즐기는 비결은 두 가지 뿐이야."

가와사키가 경쾌하게 말했다.

"클랙슨을 울리지 않는 것과,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 것."

"얼토당토 않는 소릴."

"원래 세상은 얼토당토않지."

가와사키는 진심으로 비탄에 잠긴 것 같았다.

"안 그래?"

 

p. 188

 

와쿠이 씨는 애완동물이 도난당한 것을 자신의 실수나 오점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동정을 사려고 했지만 그러는 사이에 비웃음당하는 느낌이 들어버렸다. 있을법한 이야기다.

 

게다가 그녀는 레이코 씨에게 경쟁심을 품고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

 

연령도 비슷하고 미혼인 점도 같았다. 놓인 상황이 비슷하면 동지 의식이 싹트거나 경쟁심이 생기거나

둘 중 하나인데, 와쿠이 씨의 경우는 명백히 후자였다. 레이코 씨는 미술품 같은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자에게는 흥미가 없어 보이고, 무표정하고 차가운 대응밖에 안 하는 걸로 보이는데 손님들의 평판은 좋으니

와쿠의 씨로서는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얼마든지 있으리라.

 

p. 189

솔직하게 목적을 밝히기로 했다.

비뚤어진 적과 상대할 때는 내 속을 다 내보이며 정면으로 마주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p. 208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구내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벽에는 동아리 홍보 벽보가 붙어 있고, 선배들이 여기저기서 신입생에게 말을 붙이고 있었다.

훔쳐 온 것으로 추측되는 주점 간판에 동아리 이름을 크게 쓴 종이를 붙여 놓기도 했다.

유치하다는 건 확실했지만 아마도 대학 생활은 이 유아성을 만끽하기 위한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p. 220

나는 완전히 주인공인 것처럼 살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의 인생 속에서는 단역에 불과하다.

그런 사실을 지금 와서 겨우 깨닫는다.

가와사키들의 이야기 속에, 나는 나도 모르게 끼어든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얼빠진 구석이 있으니 말이다.

 

p. 221

"마침 아이스크림을 먹는 꿈을 꾸던 참이야."

나는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가서는 냉장고 안에서 컵 아이스크림을 두 개 가져와 도르지에게 하나 건네주었다.

"고토미는 꿈을 현실로 만들었어. 굉장한데."

 

p. 233

"알겠니? 너에게 보내는 생활비는 내가 이 작은 양화점에서 필사적으로 번 돈이야.

하지만 그건 신경쓰지 말고 써."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뭘 신경 쓰지 말고 쓰라는 거야. 역시 신경쓰인다니까.

 

p. 238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자전거 보관대 옆에서 까마귀 두 마리가 떨어진 나무 열매를 가지고 다투고 있었다.

판관처럼 나는 한참 체격이 작은 쪽을 응원했지만 역시 큰 녀석이 이겼다.

부리로 쉼없이 공격한 끝에 상대를 물러서게 만든 다음 그 틈을 타서 나무 열매를 물고 깔끔하게 날아갔다.

나는 까마귀 두 마리가 모두 사라진 뒤에 집에 전화를 걸었다.

꼭 유괴범이 몸값을 받아내기 위해서 여기저기 전화로 지시를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p. 295

머리맡의 시계를 보니 밤 10시. '어째서 이 시간에'라고 전화를 건 사람을 나무라기에는 이른 시간,

오히려 '어째서 이 시간에' 벌써 잠들었느냐고 상대방에게 야단맞아도 될 법한 시간이었다.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잠결이라 그런지, 웬 젊은 여성이 잘못 건 전화라서

그걸 인연으로 연애가 시작되지는 않을까 하는 바보스러운 기대가 머리를 스쳤다.

구조, 극적인 전개. 그런 바람이 머릿속을 비추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수화기 건너편에서 내 이름을 부른 것은 익숙한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p. 440

'딩동……' 하고 하늘로 녹아 드어갈 듯한 긴 소리가 언제까지나 내 안에서 들리고 있었다.

밥 딜런은 아직 울리고 있을까?

문득 그 생각이 났다. 좁은 코인로커 안에서 자기 페이스를 무너트리지 않고

계속해서 노래하는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면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밥 딜런은 아직 울리고 있을까?

어떻게 생각해. 가와사키?

나는 발치를 내려다보며 한 걸음씩 언덕 끝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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