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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 사신 치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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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29 

"세상이란 참 불합리하지요." 

재치가 있는 말인 듯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표현하고 있지 않은 대사를 읊어본다. 

이런 공허한 말이 때때로 막간을 채워주기도 한다. 인간이 즐겨쓰는 수법이다.

 

p. 240 

"환멸?"

"의지하던 사람이 사실은 겁쟁이였다든가, 믿고 있던 영웅이 실은 담합에 능통한 교활한 사람이었다든가,

같은 편이 적이었다든가. 그런 일들에 인간은 환멸을 느껴요. 그리고 고통스러워 하죠. 동물이라면 아마 다르겠죠."

"그것과 호수가 무슨 관계가 있지?"

"그 넓은 호수라든가, 아름다운 오이라세의 계류는 절대로 나를 배신하지 않아요. 환멸을 느끼게 하지 않아요.

그렇게 확신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안심했죠."

 

p. 246

"그래서, 어떻게 됐지?" 

"당신, 대단히 침착하군."

"그런가?"

"나는 십오 년 동안이나 이 일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고. 큰맘 먹고 당신에게 이야기했는데 너무 담담한 반응이잖아."

"미안해. 나는 무슨 말을 들어도 놀라질 않아."

흥, 하고 모리오카는 기분 나쁘다는 듯 나를 보며

"내가 지금부터 한 사람을 더 죽이러 갈 작정이라고 말한다면 놀라겠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나는 솔직하게 말한다.

"놀라지 않아."

 

p. 257

"단정 짓지 마.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이 성격을 비뚤어지게 한다는 건 영화 같은 데서 자주 나오는 패턴이잖아. 똑같이 취급하지 마."

 

p. 261

"왜 그래, 좀더 신나게 때려도 되는데."

나는 상대를 선동할 생각이 아니라 격려해줄 요량으로 말했다.

철퍼덕 물구덩이가 튀는 소리가 나서 오른쪽을 본다. 빡빡머리가 쓰러져 있고 모리오카가 그를 난폭하게 걷어차고 있었다.

고장난 용수철 인형처럼 오른쪽 다리를 날리고 있다. 빡빡머리는 배를 접고 입을 마름모꼴로 벌린 채 헐떡거리고 있었다.

모리오카가 세단을 향해 달렸기 때문에 나도 따라가기로 했다.

"너 이 자식, 기다려."

동안의 젊은이가 다시 한 번 내 멱살을 잡으려 한다.

"계속 때릴건가? 나는 아침까지 맞고 있어도 상관은 없지만" 하고 나는 대답한다.

그러자 상대는 당황한 듯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세단의 뒷좌석 문을 열고 모리와가 차 안을 들여다본다. 뒤쫓아 간 나도 옆에서 안을 본다.

"괜찮아?" 하고 모리오카는 차 안에 말을 걸었다. 그의 뺨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다.

입고 있던 셔츠도 어깻죽지가 찢겨져 나갔다. 입술과 눈초리에는 핏자국도 있었다.

뒷좌석에는 고등학생 교복을 입은 여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선탠을 한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있다. 치마가 뒤집혀 있다.

"이봐, 달아나." 무리오카가 손을 뻗자,

그 때 천만 뜻밖에도 여자는 화난 표정을 보이며 발로 모리오카의 팔을 걷어찼다.

"뭐하는 거야! 달아나다니 무슨 소리야?"

여자는 으르렁대며 잇몸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

"너 유괴당한 거 아니야?"

모리오카의 눈은 이미 초점을 잃은 듯했다.

"뭐?" 여자는 눈썹을 확 찌푸렸다.

"오빠들이랑 드라이브하러 나온 것뿐이라구.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 장난하니."

 

p. 288

"여긴 말이야 강의 상류, 출발 지점이잖아. 그게 이 폭포야. 여기는 화려하고 사람도 많잖아.

그건 말이야 우리가 태어날 때와 닮지 않았어? 우리도 태어날 때는 이랬겠지?

야단법석에다 사람들의 주목도 받지. 다들 축하해주고.

하지만 그게 차츰 지나면 지금 보았던 것처럼 넘실넘실 소박하게 흘러가게 될 뿐이야.

뭔가 닮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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